‘누벨바그의 거장’ 장 뤽 고다르의 매혹적인 삶과 그의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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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스위스계 프랑스 영화감독 장 뤽 고다르는 논쟁의 여지없이 가장 중요한 영화 제작자 중 한 명이며, 영화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1950년대 후반에 시작하여 수십 년에 걸친 그의 경력 내내, 그는 고전 영화 제작의 규칙을 탈피하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 영화를 탄생시켰다. 프랑스 누벨바그의 다른 멤버들과 함께 고다르는 영화 제작자들에게 실험하는 방법, 예술의 혁명가가 되는 방법을 가르쳤다. 고다르 이전에 영화는 일반적으로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있다는 것을 잊는 것을 목표로 가능한 한 삶을 가깝게 모방하도록 만들어졌다. 하지만 고다르는 시청자들에게 그들이 보는 영화가 현실과 영화 제작이 계산된 거리에서 함께 만들어내는 예술적 가치의 원천이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어 했다. 고다르를 제외하고 영화 제작 역사에서 존경받는 인물을 생각하는 것은 어렵다.
장 뤽 고다르는 2022년 9월 13일 그의 집에서 평화롭게 사망했다. 영화계에 대한 그의 공헌을 기리기 위해, 그의 매혹적인 삶과 시대를 돌아보자.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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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심리학의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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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중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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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제공하는 모든 특권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고다르는 결코 정규 교육에 관심이 없었다. 파리의 명문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후, 영화광이었던 그는 표면적으로는 인류학 학위를 위해 파리 대학에 등록했지만, 그는 영화를 보고, 읽고, 그리고 영화를 쓰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영화 학교에서 거절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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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 노동자 고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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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담하고 고등 교육을 포기한 고다르는 1952년 스위스로 돌아가 어머니와 함께 살고 댐 건설 현장에서 일했다. 영화 제작의 생각이 처음으로 고다르에게 떠오른 곳이 바로 이곳이었고, 그는 파리로 돌아가기 전에 댐 건설을 연대기적으로 기록한 20분짜리 다큐멘터리 ‘콘크리트 작전'(1955)이라는 그의 첫 번째 단편 영화를 촬영하기로 결정했다.
비평가 고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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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영화에 끌렸을 때부터 고다르의 관심은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것이지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1950년에 동료 에릭 로머, 자크 리벳과 함께 고다르는 비평 잡지 ‘라 가제트 뒤 시네마’ 5호를 제작했다.
‘카이에 뒤 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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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르와 그의 주변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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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트뤼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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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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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훔치고 도망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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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멋대로 해라’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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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고다르의 많은 걸작들 중 첫 번째 작품인 ‘네 멋대로 해라’가 개봉되었다. ‘네 멋대로 해라’는 그 이전의 어떤 영화와도 달랐고, 고전 영화 제작의 거의 모든 규칙을 깨뜨렸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법망에서 도망치는 두 명의 경범죄인을 중심으로 느슨하게 전개된다.
영화의 본질을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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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누벨바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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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모든 특성은 프랑스 누벨바그와 동의어가 되었다. 고다르와 그의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영화의 관습을 없애고, 영화계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언급하고, 서로에게서 배우고, 영화 역사상 가장 빛나는 순간들 중 하나로 역사에 남을 영화계를 만들었다.
프랑스 누벨바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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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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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르와 누벨바그의 영향력이 너무 커서 그들의 혁명적인 기법 중 일부는 너무나 일반화되어 현대 영화에서 자주 사용된다. 그러한 기술 중 하나가 점프 컷이다. 점프 컷은 긴 연속 샷의 중간 부분을 잘라내어 앞으로 점프하는 느낌을 낸다. ‘네 멋대로 해라’ 이전에는, 이것은 편집 실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고다르는 그것을 스토리텔링의 강력한 도구로 만들었다.
즉흥성에 대한 집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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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르는 또한 통제되고 계산된 영화 제작을 싫어해 차별화된 방법을 채택했다. 장면에 대한 아주 작은 세부 사항들은 촬영 당일까지 결정되지 않았다. 영화 촬영은 거의 사전에 촬영되지 않았으며, 고다르는 즉흥적으로 카메라를 이끌었다.
이동 중 스크립트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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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르의 즉흥적인 철학에서 대본도 예외가 아니었다. 1960년대에 제작된 그의 많은 영화에서 고다를는 촬영 당일에도, 심지어 촬영 중에도 대사를 바꿨으며, 카메라가 돌아가는 동안에 배우들에게 새로운 대사를 주며 시나리오를 쓰곤 했다. 배우들이 그들의 역할에 몰입할 시간을 거의 주지 않았던 이 기법은 고다르의 초기 영화에서 독특하고 다큐멘터리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사랑에 빠진 고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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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많은 예술가들처럼, 장 뤽 고다르도 그의 뮤즈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연애는 그의 창조적인 비전과 얽혀 있었다.
안나 카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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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경멸’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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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느 비아젬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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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르와 카리나가 헤어진 지 3년 후, 고다르는 여배우 안느 비아젬스키와 결혼했다. 비아젬스키는 고다르가 ‘카이에’에서 긍정적인 평을 쓴 프랑스 거장 로버트 브레송의 고전 ‘당나귀 발타자르'(1966)에 처음 등장했다. 그 둘은 1967년에 결혼했고 1979년에 비아젬스키가 고다르를 떠날 때까지 ‘중국 여인’와 같은 영화를 공동으로 작업했다.
영화의 사회적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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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누벨바그의 많은 영화들은 현대 유럽 생활에 대한 영화 제작자들의 혐오감을 사회적, 정치적, 예술적 수준에서 다루었다. 1960년대 초 고다르의 영화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계급과 소비주의의 문제를 다루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다르는 훨씬 더 이념적으로 집중된 방식으로 그들 자신을 표현했다.
고다르의 정치 성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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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영화제 폐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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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르와 프랑스 영화계의 다른 구성원들은 1968년 5월의 총파업과 광범위한 시위 이후 행동에 대한 새로운 요구를 느꼈다. 당면한 사회 문제에 집중하지 않은 것에 대해 사회와 자신에게 실망한 고다르와 트뤼포, 루이스 말레,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 구성된 그룹은 1968년 칸 영화제를 폐쇄했고 경쟁에서 어떤 영화도 현재의 문제를 적절하게 다루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고다르는 기자회견에서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하며, “우리는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라고 덧붙였다.
“코닥은 인종차별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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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백인이 아닌 사람들의 신체적 특성, 즉 어두운 피부색을 적절하게 포착하는 필름의 능력에 대한 관심은 수년에 걸쳐 있었지만, 고다르의 도움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모잠비크 정부를 위해 단편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고다르는 코닥 영화가 어두운 피부의 사람들의 세부 사항과 복잡성을 충분히 포착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점점 더 좌절하게 되었고, 이 영화를 “본질적으로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불렀다. 고다르의 말이 옳았다. 코닥의 “셜리 카드”는 필름 사용자와 개발자 모두가 색 대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사용한 색 참조 카드로 1995년까지 밝은 “백인”의 피부색만 사용했다.
‘영화의 역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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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르의 후기 걸작인 266분 길이의 논픽션 서사시 ‘영화의 역사’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술 작품 중 하나이다. 이 프로젝트에서 고다르는 개념으로서의 영화의 역사, 20세기 영화 제작의 이야기, 영화 제작의 미래 중요성에 대해 다루었다.
은둔자 고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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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그는 계속해서 영화를 만들었지만 고다르는 대중의 관심에서 서서히 물러났고, 대신 그의 대부분의 시간을 스위스 롤의 아파트에서 보내기로 결정했다.
고다르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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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그가 이 세계를 떠났지만, 영화에 대한 장 뤽 고다르의 영향력은 영원할 것이다. 이 프랑스 거장이 매체에 남긴 지울 수 없는 흔적은 너무나 깊고, 그의 기술은 너무나 중요해서 비록 그의 이름이 잊혀지더라도 그의 스타일과 아이디어는 앞으로 오랜 세월 동안 영화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출처: (Discover Walks) (Evening Standard) (Roger Eb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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